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트르담 대성당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지금의 대성당이 있던 곳에는 성 에티엔[* 성 스테파노/스데반.]에게 봉헌한 작은 성당이 있었지만, 1160년 모리스 드 쉴리(Maurice de Sully, 1110 ~ 1196) [[주교]]는 더 [[크고 아름다운]] 성당을 짓기 위해 파리대교구에 착좌하자마자 옛 성당을 가차없이 부수고 주변의 몇몇 가옥들도 함께 철거했다. 그리고 1163년 [[교황]] [[알렉산데르 3세]]가 초석을 놓으면서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.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곳은 후진과 [[성가대]]석으로 1182년에 완공되었으나, 전체 공정의 절반도 채 끝내지 못한 상황에서 공사가 시작된 지 33년 후인 1196년 [[9월 11일]] 모리스 드 쉴리 주교가 선종했다. 대성당의 서쪽 정면은 1200년경~1225년에 완성되었고, 서쪽 정면의 탑 2개와 북쪽의 장미창은 1250년에 마무리되었으며, 나머지 부분에 대한 공사는 1250년부터 약 1세기 동안 진행되어 마침내 착공 183년 만인 1345년에 축성식을 거행했다. [[백년전쟁]]의 와중인 1431년 [[영국]]의 왕 [[헨리 6세]]가 이곳에서 프랑스 왕으로 즉위식을 거행했으나 당시 파리 시민들이 [[잔 다르크]]를 적으로 여겨 싸웠을 만큼 영국에 우호적이었음에도 그들의 반발을 불렀다.[* 원래 프랑스 왕이 정식으로 즉위를 하려면, [[랭스]]에 있는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해야 한다. 당연히 영국 왕실도 [[헨리 6세]]를 그곳에서 프랑스 왕으로 정식으로 즉위시키고자 했으나, 이미 [[잔 다르크]]가 1429년에 랭스를 탈환하고 그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게 해서 [[샤를 7세]]를 프랑스의 정식왕으로 즉위시킨 바람에 헨리 6세는 랭스에서 대관식을 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. 따라서 여기에서 한 건데, 오히려 이게 엉터리 대관식이 되어 [[어그로]]를 끌어버린 것이다.] 1456년에는 이 곳에서 [[잔 다르크]]의 명예회복재판을 [[교황청]]이 열어서 1431년 영국 측과 친영국파 프랑스 성직자들이 벌였던 종교재판으로 화형당한 잔 다르크의 이단 판결과 마녀 혐의를 무효화하여 복권했다. 그래서 잔 다르크 성녀의 [[성상(조형물)|성상]]이 이 성당 안에 있다. 18세기에는 성당이 어둡다는 이유로 성직자들이 [[스테인드 글라스]]를 일반 유리로 바꾸고 [[그로테스크]]한 [[가고일]] 상을 제거하는 등 [[신고전주의]]적인 취향에 따라 손을 보았다. [[프랑스 혁명]]이 발생하자 귀족문화, 종교문화 자체를 증오하는 시민들에게 에마뉘엘 이라는 종을 제외한 모든 종이 녹여지고, '옛 프랑스 왕으로 오인된' [[성경]] 속의 왕의 조각이 목이 잘리는 등 각종 조각이 훼손되고 [[이신론]]자들의 신전으로도 쓰이기도 했다. [[프랑스 혁명]] 이전의 전근대 사회에선 이 성당이 프랑스의 기득권 사회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. 노트르담 대성당의 성직자는 프랑스 귀족 계층에서 배출되었으며, 프랑스 귀족과 기득권층의 법률적 옹호기관인 고등법원의 관료 역시 노트르담 대성당의 성직자들과 혈연관계인 경우가 대다수이다. 때문에 이 대성당이 프랑스 혁명 당시 가장 먼저 공격을 받고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다. [[1804년]] [[12월 2일]]에는 [[교황]] [[비오 7세]]가 참석하여 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]]의 황제 [[대관식]]을 이 성당에서 치루었는데, 이를 위해 대성당의 주변 건물을 철거하는 등 많은 정비를 하였다. 성당의 입구에는 신 [[고딕]]식의 나무 문을, 실내는 [[신고전주의]] 건축처럼 보이게 장식하였으나, 임시로 덧댄 것들이라 오늘날에는 남아있지 않다(대관식에 대해서는 [[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]] 참조) [[나폴레옹 전쟁]]을 거치면서 내부가 외양간으로 쓰여지는 등 성당의 사회적 가치는 심하게 손상되었다.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[[빅토르 위고]]가 성당의 훼손, 파괴를 막으려고 쓴 소설 [[파리의 노트르담]]이 인기를 끌면서 평가도 좋아졌으며, 건축가인 장바티스트 라쉬(Jean-Baptiste Lassus)와 외젠 비올레르뒤크(Eugène Viollet-le-Duc)에 의해 1845년부터 근 20여년 동안 복원에 들어간다. [[스테인드 글라스]]와 [[성상(조형물)|성상]]들, 중앙 첨탑(flèche)[* 13세기에 지어졌으나, 1786년에 헐렸다.] 등이 이 시기에 복원되었다. 다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 시기에 만들어진 많은 것들은 뒤크의 취향에 따른 창작에 가깝다. 이후 1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양차대전을 겪으면서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, 2019년 4월 15일 [[노트르담 대성당 화재|화재]]로 인해 13세기로부터 내려오던 목조 지붕[* 코러스 부분에는 건축이 시작되던 12세기의 지붕이 있었지만, 원인미상으로 사라져 13세기에 네이브 등 나머지 부분들의 지붕이 만들어지던 시기에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.]과 19세기에 만들어진 중앙 첨탑이 소실되고 석조 볼트가 일부 파손되는 등의 큰 피해를 입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